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일랜드 왕국 (문단 편집) == 재정복 이후와 병합 == [[올리버 크롬웰]]은 아일랜드를 재정복하고 아일랜드 내부의 핵심적인 정치 세력으로서 정국을 주도했던 [[가톨릭]] 귀족들과 [[켈트족]] 족장들의 기반을 절멸시키기 위한 포괄적인 토지 강탈과 재분배 정책을 벌였다. 크롬웰의 병사들은 아일랜드 전역을 점령하고 나서 원래 주민들은 늪지대만 가득한 쓸모 없는 땅인 서부의 코노트 지방에 가두어 버리고 나머지 주요 토지는 전부 다 자신을 따라온 부하들에게 분배했다. 이후 가난한 대다수 [[가톨릭]] 소작농을 극소수의 [[개신교]] 지배층이 착취하는 기형적인 사회 구조가 생겨났다. 오늘날 아일랜드의 [[게일어]]([[아일랜드어]]) 우세 지역이 아일랜드 서부의 코노트 일대에만 분포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독실한 [[청교도]] 신자였던 크롬웰은 이 시기부터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 본토 [[켈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청교도]]를 믿는 스코틀랜드계 [[켈트족]]들을 아일랜드 섬에 데리고 온다. 원주민들인 [[가톨릭]] [[아일랜드인]]들을 대거 내쫓고 들어온 이주민들인 [[개신교]] [[스코틀랜드인]]들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가까운 지방인 북동부의 [[얼스터]] 지방에 모여 살면서 정착했는데 얼스터에서 이들이 토착민들보다 점점 많아지면서 그 외 아일랜드 지방과 종교적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이 일은 훗날 [[북아일랜드 분쟁]]의 원인이 된다. 크롬웰이 죽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동군연합]]이 왕정으로 되돌아가면서 아일랜드 왕국도 부활했다. 그러나 1694년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윌리엄 3세]]의 원정으로 인해 아일랜드 왕국에 대한 압제는 더욱 심해지게 된다. 이때 실시한 잉글랜드의 대아일랜드 정책은 종교 탄압과 출신 지역 차별이었다.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은 공직 진출이 아예 완전히 봉쇄되었고 개신교도들도 아일랜드 출신이란 이유로 고위직 진출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토착 아일랜드인 뿐만 아니라 부계 선조가 잉글랜드계나 스코틀랜드계 이주민인 경우도 포함되었다.] 아일랜드는 주권을 잃고 서서히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일부로 동화되었는데, 18세기 후반에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고(高)교회파([[가톨릭]]적 특성 강조) [[성공회]]에서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곧 울프 톤[* 개신교계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을 중심으로 신교-구교 연합조직인 '연합 아일랜드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항해 현재의 [[북아일랜드]]인 얼스터를 근거지로 삼았던 저(低)교회파([[개신교]]적 특성 강조) [[성공회]]와 [[장로회]] 구성원들이 '오렌지 오더(Orange Order)'[* 오렌지는 윌리엄 3세의 상징색이다. 친(親)영국파인 이들의 색깔을 잘 보여준다.]를 결성했으며, 1798년에 '연합 아일랜드당'이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봉기를 일으켰으나 영국군과 '오렌지 오더'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결과 아일랜드인들의 효과적인 통제을 위해 영국 의회는 1800년 통합법(Acts of Union 1800)을 통과시켜 영국과 아일랜드를 정식으로 하나로 합치기로 결정하면서 1801년 1월 1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수립되어 아일랜드 왕국은 소멸하였다. 다만 [[자코바이트]]파는 이를 [[명예혁명|쿠데타]] 이후에 즉위한 정통성 없는 왕이 불법적으로 행한 일로 간주하여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의 아일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데 자세한 건 자코바이트 항목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